- 다시 현실.
시나는 용인에 있는 아파트를 팔았다. 사실 그대로 두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감당하고 관리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돌아가신 부모님도 이해해 주실것이라고 믿었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가족사진뿐이었다. 워낙 검소하게 살던 분들이라 물건이 간소했다. 또 그녀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도 팔았다. 시나는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셨다. 여자 혼자서 평생 살아가는데 문제 없을 정도의 돈을 남겨주셨다.
시나는 그런 서류를 정리하며 그분들의 치열한 삶을 생각하며 울음을 참아가며 정리했다. 현재 다니고 있었던 회사도 나왔다. 막상 모든 것을 정리하며 시나는 앞으로 자신이 어디서 살아갈지 정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그녀가 가장 믿는 언니였다.
“시나. 나 은영이야. 생각해봤니? 나 사는 곳으로 와. 다시 너도 살아야지. 그래? 잘됐다. 오늘 당장 와. 집부터 내가 알아보고 있을께. 오면 우리집에서 지내면서 천천히 생각하자. 바로 출발해. 기다릴께.”
시나는 혼자서 그 모든걸 온 몸으로 견딜 때 함께 끝까지 있어주던 언니의 제안을 수락했다. 언니는 파주에서 살고 있었다. 원래는 서울에서 살았지만 결혼하면서 오빠가 파주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지금까지 쭉 살고 있었다.
시나가 더 이상 혼자 있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 그녀가 파주에서 같이 살길 원했었다. 시나는 뒤를 돌아 그녀가 속했던 이곳에 작별을 고했다. 자동차는 파주에 들어서고 있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어찌되었든 살아야 한다.
파주에 온지 한달이 지났다. 은영언니는 같이 살자고 강력하게 말했지만 시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언니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혼자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도움으로 작은 아파트를 구해 그녀의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또한 형부가 알려줘서, 신축된 도서관에 계약직사서에 지원해서 면접을 통해 채용되었다. 시나는 새로운 자신의 집에서 아침을 맞이할때면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매일밤 눈을 감을 때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게 해달라고.
매번 새벽에 소스라치며 놀라 일어났다. 얼굴은 눈물범벅이고 몸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시나는 꿈속에서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가족을 뒤쫓았다. 가지말라고 그토록 크게 소리치며 달려가지만 언제나 자동차는 그녀보다 먼저 출발했다. 시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며 소리내어 울었다. 매일 반복되는 꿈이었다.
거울속의 그녀는 웃음을 잃은 형체없는 그림자 같았다. 도서관으로 향하며 숨을 크게 쉬었다.
‘오늘도 살자.’
시나는 하루 하루가 버겁게 느껴졌다. 한빛도서관은 일주일에 한번씩 수만권의 장서와 각종 디지털 자료가 들어왔다. 도서관의 사서는 이용자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앉아 근무하며 가끔 책을 들추며 대출 반납을 돕는 사서라는 직업이 편히 근무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대놓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사서는 말 그래로 ‘사서 고생하는 사람’이라고 그들 스스로를 말한다. 계속 쏟아지는 자료를 분류하고 입력하고 각 자료에 그에 맞는 각 기호를 라벨작업하고 또한 서가에 올바르게 꽂기 위해 무거운 북트럭을 하루에도 수십개 민다. 또한 책 자체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에 사서들은 땀에 쩔어산다. 데스크 근무 하는것도 마찬가지였다. 민원상대는 힘들다. 모든 이용자가 책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화가 나서 온 사람들도 상당하다. 그들은 자신의 기분을 사서에게 푼다.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해대며 꼬투리를 잡기도 했다.
시나는 얼마전 그만두었던 회사 다니기 전부터 도서관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했다. 은영언니 남편이자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내던 정우는 시나가 한빛도서관에 들어와서부터 자신의 근무환경이 달라짐을 느꼈다.
다른 사서와 불편하게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또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다. 그래서 시나가 들어옴으로 인해 그들과 소통을 할수 있었다. 어젯밤 정우는 은영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나가 왜 이혼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은영은 무엇이든 솔직히 자신에게 말하는 시나가 유독 그 이유를 피하는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그 둘은 시나가 다시 예전처럼 잘 웃고 살아가길 바랬다.
정우는 출근하자마자 그 앞에 쌓여진 행정서류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왜 행정업무까지 떠안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눈에 띄는 공문이 보였다.
협조요청 이었다. 파주는 군부대가 많은 지역으로 많은 협조가 쏟아졌다. 정우는 서류를 들어 꼼꼼히 읽었다. 부대안의 병영도서관을 만드는데 도움을 요청하는 공문이었다. 약 두 달 가량 예상한다는 공문의 내용에 그는 공문에 답하기 위해 도서관장에게 결재를 요청했다. 협조자 이름 란에 자신의 이름과 시나 이름을 넣었다. 반복되는 도서관업무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은 시나에게 도움이 될수 있지않을까 하는 친오빠같은 심정이었다.
그 날 오후 군부대에서 담당하사관과 그 선임이 방문하여 구체적인 실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정우는 시나와 함께 회의에 참석하고자 했지만 시나는 세미나가 있어 함께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보는 파란하늘의 도서관엔 이용자들이 더욱 많았다. 시나는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에 관련한 팜플렛을 들고 도서관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멀리서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나야, 아니 최선생님!”
시나는 팜플렛을 내려보다 눈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습하지 않은 바람이 시나를 향해 불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정우 뒤에는 두 명의 군인이 서있었다. 오늘 관련회의를 한다고 했는데 벌써 끝날 시간인데 조금 늦어진 모양이었다.
시나는 정우를 향해 걸어갔다. 민호는 정우가 부른 방향을 보다가 숨이 멈춰졌다. 그때 비에 젖은 눈물가득한 그녀였다. 준위님이 말한 그 시나. 민호는 손에 쥔 서류를 꽉 잡았다.
다가온 시나는 그때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하지만 조금 야윈 모습이었다. 어깨를 덮어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움직였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긴 속눈썹사이로 피곤함을 느낄수가 있었다. 그때 정우는 소개했다.
“최선생님, 내일부터 우리가 병영도서관 신설할 곳의 담당자에요. 이분은 최종 담당자인 한준희 상사님, 그리고 옆의 이분은 우리가 가장 많이 만나게 될 실무자인 성민호 하사님. 그리고 이분은 자료의 분류나 다른 기타부분을 할 최시나 선생님입니다. ”
민호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시나를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좀더 가까이서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녀 앞에 서자 시나는 더욱 작아보였다. 그의 가슴보다 한뼘 아래였다. 시나는 자꾸 자신을 쳐다보는 젊은 하사의 눈길이 신경쓰였다. 한편 민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에게 서운함마저 느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것만으로 벅찼다.
시나는 데스크 교대근무를 위해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군인이 떠올랐다. 왜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지 기분이 언짢았다.
키가 190에 가까운 약간 까만 피부에 쌍꺼풀이 없는 눈을 가진 날렵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 낯설지 않았다.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랜 군인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보던 군복에 친밀감이 느꼈던 것 같았다.
갑자기 시나의 책상 위로 제과점 빵이 놓여졌다. 정우였다. 윙크를 하며 씩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가는 그를 보며 시나는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구나 싶었다. 먹는 것도 일과가 되어버린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부대로 복귀하는 민호는 옆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선임의 눈빛은 생각지도 않은 채 앞만 보며 운전했다. 머릿속이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그동안 답답하던 무언가가 저 멀리 물러가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던 그녀가 다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신이 살아온 24년 동안 이성에게 아주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방의 적극적인 관심에 곤혹을 치른 적이 여러 번이었다. 민호는 마음가는대로 이끄는 사랑을 믿었다. 그러나 아직 그런 사랑은 없었다. 아직은.
멍해있는 민호를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눈빛이 강하고 절대 실수를 용납지 않는 민호를 어려워만 하던 병사들과 그를 마주하는 선배들이 흘깃거리며 민호를 훔쳐봤다.
내일이다. 내일부터 그녀를 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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