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고파요.
연주가 끝나고 여전히 밴드는 조용히 정리하고 자리를 떴다. 희재는 그들 틈으로 예인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예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희재는 손이 떨려왔다. 얼마 만에 보는 건데, 할 말도 많고 잘 지냈는지, 궁금한 것도 많은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밴드는 조용히 나간 모양이었다. 조도 두리번거리며 예인을 찾았다.
바에 힘없이 주저앉은 희재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가 아닌가보다.
손님들은 여전히 오고 가고 한다. 새벽 4시가 가까워오며 손님들도 점점 각자의 집으로 가고 있을 때 희재는 자신만 갈 데가 없는 손님인 마냥 바에 앉아 술 한잔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희재는 술을 잘 하지 못했다. 바텐더는 그런 희재의 모습에 얼어있었다. 차가운 사장님이 조용히 아무말없이 잔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모습에 퇴근 준비하는 다른 직원들의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봤다.
뒤에서 조가 가라고 눈짓을 했다. 바텐더는 목으로 인사하며 빠져나갔다. 조는 다시 한숨이 나왔다.
그 때 한 여자가 들어왔다. 퇴근하던 직원들은 눈빛만 교환하며 서둘러 나갔다. 축 늘어져 바에 혼자 앉은 희재 옆에 그 여자가 앉았다. 조는 눈이 커졌다. 희재는 무신경한 눈빛으로 옆으로 쳐다보며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입이 벌어졌다.
예인이었다. 아까의 그 옷이 아니었다. 예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다 희재가 만 지막 거리던 술잔을 낚아채며 단숨에 들이켰다. 이어서 나온 그녀의 기침소리. 놀란 희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쥐며 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두사람의 눈빛이 마주칠 때 희재는 울 것 같았고 예인은 장난꾸러기 표정을 지었다.
“나 배고파요.”
조는 이미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고 콧소리가 나왔다. 저 귀여운 두 사람. 왕창 배부르게 먹이고 싶었다.
아주 맛있게 먹는 그녀의 모습에 조는 맥주를 천천히 마시고 지켜봤다. 희재는 먹는 그녀의 숟가락 위로 김치를 올렸다. 예인은 또 입을 비죽이 내민다. 조는 큰소리로 웃으며 맥주를 더 마시자고 외치며 자리를 떴고 희재는 당근을 골라내는 예인의 접시에 포크로 당근을 집어먹었다.
예인은 한쪽 보조개를 살짝 잡으며 또 비죽 거렸다.
“나 뉴욕가요. 그냥 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졌어요. 전공은 문학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어요. 변경될 수도 있는거고. 지낼 곳이랑 학교도 이미 알아봤어요. 몇 년이 걸릴지 생각 안 했어요.. 그냥 무작정 가는 거예요.. 경제적인 건 염려 마요.. 그동안 보험금이랑 저축한 거 하나도 안 썼어요.. 이제, 이제 그 돈 쓸려고 해요”
포크로 당근을 집어먹던 희재는 순간 당근을 삼켰다. 밥을 먹으며 무심히 말하는 그녀에게 화도 났다.
희재는 차마 예인을 볼 수 없었다. 그녀를 보면 눈물이 날것 같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조는 맥주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말 없이 조용히 다시 먹기 시작한 두 사람 뒤로 그림자만 움직였다.
희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예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대로 보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맛있게 먹는 희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 손을 마음껏 잡아볼수만 있다면. 저 작은 얼굴을 나의 두손에 감싸 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저 입술에 입맞출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답답한 현실이 싫었다. 지금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일부러 더 명랑한 모습을 보였다.
조는 희재의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꽁꽁 숨겨둔 희재의 마음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답답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저 두사람, 저들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라고 스스로 정리했다.
어둑한 조명아래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조용히 흐르는 음악이 고맙기까지 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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