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희재는 누워있는 예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탈수 증세라고 한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문 옆에 서서 조는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했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저 작은 여자가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조는 갑자기 쓰러진 여자를 안고 소리치는 희재의 모습에 더 놀랐다. 단골 의사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 후 빨리 와달라는 말을 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빨리 병원가야 한다는 희재를 제지하느라 힘을 다 뺐다.
예인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희재, 두 사람이 운명같은 것으로 묶여있다면 아무쪼록 좋은 인연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곳이 어딘지 빨리 생각했다. 흐려지는 정신속에 고함치는 희재의 모습과 무섭게 생긴 흑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나의 손을 잡고 자신의 이마에 대고 있는 이 사람은 희재였다. 예인은 그의 행동이 부담스러웠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이랬다. 항상 자신을 볼때마다 눈빛이 애잔했다. 꼭 내가 자기 여자라도 되는것 마냥. 예인은 그에게서 손을 가만히 뺐다. 희재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안도감과 당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많이 힘들었죠. 잘왔어요. 정말 잘 왔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예인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의 말도. 저 태도도.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배고파요.”
예인은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를 돌리고 이불을 얼굴 위로 올렸다. 조는 열린 문으로 예인의 말을 듣고 기뻤다. 이제 저 작은 여자가 살겠구나 싶었다.
환한 얼굴로 나오는 희재에게 알겠다는 손짓을 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희재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주방으로 먼저 들어가버렸다. 조는 오랜만에 요리를 하겠다는 희재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리고 주방에 기대어 희재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능숙한 손놀림에 기가 막혔다. 저렇게 잘하면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희재의 모습에 이름 모를 배신감도 느꼈다.
예인은 천장을 쳐다보며 음식을 먹은 지가 얼마나 되었나 생각했다. 피아노 연주를 하기 위해 건반에 올리는 순간 감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급하게 들려오는 열차사고 소식. 시간은 나만 그 자리에 가만히 두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모두 사망했다는 대사관측 사람들.
날 가엾게 쳐다보는 눈빛. 모든 것을 믿을수 없었다. 같이 죽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없는 자신의 모습에 다시 한번 좌절했다. 욕실에 물을 틀었다. 그 소리에 나의 가슴이 무너졌다. 울고 또 울고. 누군가 날 잡아줬으면 싶었다. 아무도 없었다. 이름을 불렀다. 들려오는건 나의 목소리. 거실에 누워 이대로 죽음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재건이 답사에 나만 빼고 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항상 같이 가자 말한 리오라는 바를 돌아오면 꼭 같이 가자고 웃으며 저 문을 나섰다.
그리고 지금 예인은 침대에 누워있다. 예인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절레 흔들며 자신의 어리석은 태도에 실망하며 침대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현기증이 났다. 주저앉은 예인은 혼자 투덜댔다.
문이 열려있었는지 누군가 급하게 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는 순간 하얗고 커다란 손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희재였다. 급하게 올라왔는지 그의 허리에는 앞치마가 둘러져 있었다. 예인은 눈을 내려깔며 그의 손길을 거절했다. 희재는 그녀의 저항에 손을 놓으려다 그녀의 무너지는 걸음에 다시 한번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강제로 그녀를 안아 문을 나섰다. 희재는 너무나도 작은 그녀를 안고 가슴이 벅찼다. 놓고 싶지 않았지만 거실의 의자에 그녀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예인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내려놓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거실에는 노란접시에 김이 모락모락 나고 색깔이 앙증스러운 야채가 섞인 죽이 있었다.
맞은편의 희재는 작은 수저를 들며 그녀에게 강제로 쥐어줬다. 계단을 올라오던 조는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희재 옆이 아닌 예인 옆에 앉았다. 예인은 수저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와 앉는 조의 모습에 눈이 커졌다. 눈이 마주친 조와 예인은 가만히 쳐다봤다. 순간 예인은 고개를 황급히 돌려 자신 앞에 놓은 음식에 고개를 박았다.
“잘 먹겠습니다.”아주 작은 소리로 읖조리듯 말하고 예인은 죽을 한 입 먹었다. 예인은 입에 죽을 물고 앞의 희재를 쳐다봤다. 희재는 긴장했다. 너무 오랜만에 음식을 했을까 혹 죽을 싫어하는 건 아닌지. 별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예인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조는 아주 큰소리로 크게 웃었다.
그 소리에 희재와 예인도 같이 웃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예인은 정색하며 죽에 고개를 박았다. 조는 만족스러운 듯 맥주를 마셨고, 희재는 죽을 먹는 예인에게 시선을 박았다. 예인은 맛있는 죽을 먹으며 자신의 반쪽이었던 재건이 자신에게 힘들 때 만들어주던 만둣국이 생각났다. 갑자기 눈물이 죽 위로 툭툭 떨어졌다. 놀란것은 희재가 아니라 예인이었다. 너무 갑작스레 눈물이 쏟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감당할 수가 없었다.
희재는 어쩔 줄 몰라하는 예인의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가 먹다 흘린 죽을 치웠다. 그리고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을 피하던 예인은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희재는 예인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녀의 눈물 자욱을 계속 닦아주며 눈가의 드리운 피곤함을 봤다. 아무말없이 희재는 예인을 일으켜 자신의 침대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눕히고 조용히 문을 닫고 조가 앉아있는 곳으로 갔다.
조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희재를 보았다. 자리에 앉은 희재는 고개를 등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그도 눈물이 나왔다. 조는 계속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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